좋은 생각에서 좋았던 이야기들...
17일 일요일 <아내 덕을 본 음악가>
음악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바흐는 수많은 음악가에게 새로운 기회와 영감을 준다. 그리하여 음악의 아버지라 불린다. 200년 동안 50명의 음악가를 배출한 가문에서 태어난 바흐는 어려서부터 음악의 자양분이 가득한 환경에서 지냈다. 바흐의 자식 중 첫째 빌헬름 프리데만과 둘째 칼 필립 에마누엘, 그리고 막내 요한 크리스티안 역시 이름 있는 음악가가 된다. 이는 바흐를 말할 때 그의 집안이 함께 이야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바흐 집안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있으니 그의 두 번째 부인 안나 막달레나 바흐이다. 스물두 살의 바흐는 1707년 뮐하우젠 블라시우스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부임한 직후 친척인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한다. 마리아는 1720년 병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일곱 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중 세 명만이 성장했다. 프리데만과 에마누엘이 그녀의 아들들이다. 바흐는 이듬해 열여섯 살 연하인 스무 살의 안나 막달레나와 결혼한다. 궁정 악단 소프라노였던 안나는 음악에 조예가 깊어 바흐의 음악을 이해하고 존경했다. 안나는 열세 명의 아이를 낳았으며 그중 막내가 런던의 바흐라 불렸던 요한 크리스티안이다. 바흐는 자식도 여럿이고 하는 일도 많았기에 늘 다사다난했다. 물론 경제 문제에도 신경 써야 했다. 복닥거리는 집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든 안나는 바가지 긁지 않고 묵묵히 그를 도왔다. 바흐 대신 작품을 정리한 것도 여기저기 널브러진 악보를 깨끗이 베껴 둔 것도 안나였다. 현재 바흐의 자필 악보가 없는 곡들 중에는 안나가 베낀 악보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도 음악사에 기여한 것이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아내를 위해 바흐도 여러 작품을 썼는데 대표작이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노트북이다. 이 작품집에서 가장 유명한 곡 미뉴에트는 재즈 가수 사라 본이 어 러버스 콘체르트란 제목으로 불렀으며, 우리나라에선 영화 접속에 쓰이면서 한때 방송가를 장악하기도 했다. 아내 덕을 톡톡히 본 대표적 음악가가 바로 요한 세바스티 바흐였다.
<인생의 전환점>
19일 화요일 <난독증 덕분에>
데이브디 보이스는 초등학생 때 글을 읽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몇 년 후 그는 자신이 난독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난독증을 극복하기 위해 어머니가 읽어 주는 책의 내용을 잘 듣고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법률가가 되고 싶었던 그는 법대에 진학했다. 교수의 판서를 읽지 못해 필기할 수 없었지만 강의 내용을 듣고 기억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섬세한 청각과 놀라운 기억력은 훗날 재판에서 빛을 발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의 주요 발언을 머릿속에 담아 두었다. 심지어 일 년 전의 증언과 상대방이 넌지시 시인했던 말들까지 기억해 냈다. 이러한 능력을 바탕으로 대질 신문에서 상대방 논리의 허점과 모순을 정확히 짚어 냈고, 소송을 승리로 이끌었다. 제대로 발음할 수 있는 단어가 많지 않아 누구나 아는 단어로 변론을 펴다 보니 논지가 훨씬 잘 전달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난독증을 가진 사람이 법률가가 되는 것은 불가능할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약점을 극복해 강력한 무기로 삼았다.
사랑의 걱정
"엄마는 혼자 있어도 괜찮으니까 아빠랑 밥 먹고 와." 엄마는 병실 침대에 몸을 기대며 얼른 가라고 손짓했다. 내 나이 스물세 살, 여태까지 아침을 거른 적이 거의 없었다. 그 정도로 엄마는 가족의 끼니를 중요시 했다. 그런 엄마에게 요즘 밥 잘 챙겨 먹으란 말을 가장 많이 듣는다. 뇌종양으로 입원한 엄마가 직접 밥을 해 줄 수 없으니 말이다. 며칠 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삼촌까지 많은 가족이 병실을 찾아왔다. 엄마가 뇌에 찬 물을 빼내는 수술을 받는 날이었다. 수술 시간이 다가올수록 가족들 표정은 어두워졌다. 수술복을 입은 엄마가 바람에 흔들리는 강아지풀같이 야위어 보여 착잡한 심정이었다. 그때 엄마가 나를 살며시 치더니 또다시 밥 얘기를 꺼냈다. 우리가 끼니를 거를까 싶어 자신이 수술실로 들어가면 점심을 꼭 먹으라고 당부했다. 병원 식당 말고 나가서 사 먹으라며 장소까지 정해 주었다. 수술을 앞두고도 가족 걱정만 하는 엄마를 보자니 눈물이 울컥 쏟아질 것 같아 "알아서 할테니 수술에만 신경 써."라고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러곤 괜스레 맘에 걸려 부들부들해진 엄마 손을 꽉 잡았다. 잠시 후 수술받으러 내려간다는 간호사 말이 들려왔다. 다들 훌쩍거리며 몰래 눈물을 훔쳤다. 엄마 눈에서도 눈물 한 방울이 흘렀다. "나 수술하는 동안 대기실에서 기다리지만 말고 식구들 데리고 꼭 점심먹어." 엄마는 침대에 누워 수술실로 이동하는 와중에도 흔들리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맛있는 것으로 사 먹겠노라 답했다. 수술실 문이 닫히고도 한참을 멍하니 눈물 흘렸다. 마음이 구겨진 신문처럼 울퉁불퉁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가족들과 엄마가 일러 준 식당에 가 동태찌개를 시켰다. 처음엔 모두 말이 없었다. 시끌벅적한 식당 안, 우리 식탁만 외딴섬에 갇힌 것 같았다. 그러나 음식이 나오자 조금씩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아가 서로의 마음도 쓰다듬어 주었다. 병원으로 돌아와 보호자 대기실로 향했다. 모니터에는 수술중 환자에 엄마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제발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기다리니 곧이어 엄마 이름이 회복 중인 환자로 옮겨졌다. 한 시간 뒤 보호자를 차즌ㄴ 소리가 들려 헐레벌떡 달려갔다. 붕대를 칭칭 감은 머리와 부어오른 얼굴은 수술이 얼마나 고됐는지 짐작하게 했다. 엄마는 우리 목소리가 들렸는지 스르르 눈을 떴다. "다들 점심 잘 챙겨 먹었지?" 깨어난 엄마의 첫마디였다. 전신 마취하고 나면 헛소리를 하는 사람도 많다던데, 엄마는 마취 직전까지 가족들 걱정만 했나 보다. 우리를 떠올리며 버텼을 엄마의 정신력을 생각하니 밥 한 그릇을 비운 것처럼 든든하고 배부른 느낌이었다. 가족을 향한 엄마의 사랑이 큰 힘이 되어 앞으로도 병을 잘 이겨 낼 거란 확신을 줬기 때문이다.
차마 거절하지 못해서
18년 전, 영어 교사였던 나는 런던으로 연수를 떠났다. 동료 교사와 한 조가 되어 어느 가정집으로 안내를 받았다. 주인 아주머니는 오십 대로, 아들과 단 둘이 살았다. 그녀는 저녁으로 치킨과 쌀밥을 준비했다. 한국에서 온다는 연락을 받고 특별히 준비했어요. 그 마음씨에 감동해 맛이 어떠냐는 질문에 좋다고 말해 버렸다. 그랬더니 다음 날 저녁에도, 그 다음 날에도 쌀밥이 나왔다. 반찬 없이 밥만 먹으려니 힘들었다. 게다가 한국 쌀만큼 찰지지 않아 맛이 없었다. 한국을 떠나오기 전 관계자가 현지 생활 예절을 설명하면서 싫은 것은 싫다. 좋은 것은 좋다라고 분명히 말하라고 했건만, 우리는 한국식 인사 예절에 익숙해 맛없다는 말을 차마 못했던 것이다. 며칠 주다 말겠지라는 예상과 달리 밥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식탁에 올랐다. 우리는 갈등했다. 이제라도 싫다고 할까.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냐고 물으면 어쩌지? 지금껏 밥해 준 정성은 어떡하고. 결국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치킨으로 배를 채웠다. 돌이켜 보니 그 시절 서로를 배려했던 모습이 아름답기만 하다. 돈 주고도 못 살 소중한 추억을 만들었다.
딸과 함께한 산행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초등학교 4학년인 딸과 산행을 하고 나서 아이가 얼마나 변했는지 말이다. 고백하자면 나도 그런 기대를 갖고 시작했다. 별 헤는 밤, 아이와 아빠가 침낭에 누워 이야기 나누는 것은 누구나의 동경이 아닌가? 출판사에서도 아빠와 딸의 산행 이야기라는 신선함에 출간을 의뢰했다. 하지만 그들의 초점은 우리 딸 소진이의 극적인 변화였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변화는 없었기에 집필을 미뤘다. 우리는 늘 극적이고 기적적인 것을 찾는다. 하지만 진리는 탁 쏘는 콜라 맛이 아닌 소박한 맹물 맛이 아닐까? 가장 큰 변화는 내가 소진이를 온전히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만 한 기적과 신비가 삶에 또 있을까? 내 눈에 비친 소진이는 계획 없고, 게으르며, 별생각 없이 사는 아이였다. 식탐이 많아 결혼식장에 가면 2킬로 이상 살이 찌고, 시험이 내일이라도 걱정 없이 놀기만 하고, 방은 늘 지저분하게 어질러 놓았다. 이제 중학생이 된 아이는 여전히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소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소진이의 장점을 늘 생각한다. 아빠가 도와 달라고 부르면 언제나 예 하고 달려오며, 늦둥이인 막내 종형이를 우리 대신 잘 돌보는 착한 아이다. 아이에 대한 편견을 내려놓은 것이다. 산행을 하면서 소진이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백만 불짜리 미소를 되찾은 것이다. 어릴 적 소진이는 미소 한 방으로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해 주는 천사였다. 그런데 초등학교에 들어가며 그 미소를 잃었다. 막내가 태어나 온 관심이 그쪽으로 쏠렸기 때문이다. 소진이가 미소를 되찾은 것은 산행을 시작한 지 1년이 지난 무렵이었다. 자연은 그렇게 말없이 다가와 나를 그리고 소진이를 변화시켰다. 힘든 산행길에 손을 잡아 줬고 같이 비바람을 이겨 냈고 장엄한 일출을 봤다. 그러면서 나의 틀을 내려놓았고 소진이 또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서서히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자연은 함께 존재함으로 우리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스승이다.
느림보 상우
초등학생 때 만난 상우는 모든 일이 더딘 친구였다. 느린 걸음으로 매번 지각하고, 어떤 일도 제시간에 끝내지 못했다. 축구나 피구를 해도 상우에게 공이 돌아가는 법은 없었다. 보다 못한 선생님은 같은 동네에 살던 나를 상우의 짝꿍으로 붙여 주었다. 나는 상우 집에서 같이 숙제하고 놀며 알았다. 상우가 어릴 적 사고로 머리를 다쳤으며, 상우 어머니는 공부보다 건강을 늘 걱정한다는 것을. 그래서 더 정이 갔다. 제대하고 상우의 소식을 들었다. 삼촌이 하던 동네 세탁소에서 일을 배운다기에 찾아갔다. 상우는 여전히 느린 몸짓으로 옷을 다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깜박 잠이 들었다. 저녁 먹자는 소리에 일어난 나는 벽시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밤 열 시였다. 상우는 "아...지금 여덟 시야. 삼촌이 내가 느리다고 두 시간 빠르게 맞춰 놓았어."하며 배시시 웃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간 직장이 아이엠에프 여파로 문을 닫자 나는 매일 술로 밤을 지새웠다. 늘 와이셔츠와 양복을 맡기던 내가 소식이 없자 상우한테 연락이 왔다. 같이 밥 먹자는 말에 초췌한 모습으로 찾아갔다. 상우는 일이 끝나 가니 딱 10분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이 느림보 친구가 과연 10분 만에 끝낼까 싶어 벽시계를 주시했다. 그런데 시곗바늘이 움직이지 않았다. 시계가 고장 난 것 같다고 하자 상우는 일부러 약을 빼놓았다고 했다. "느림보인 내가 시계를 따라 일하려니 마음이 바빠져서 안되겠더라고. 시간이 멈춰 있으니 내가 더 빨리 움직이는 듯해. 재밌는 사실 알려 줄까? 저 시계 말이야, 하루 두 번은 정확히 맞아. 아침 열 시하고 밤 열 시. 하하." 상우는 초등학생으로 돌아간 것처럼 해맑게 웃었다.
쓰레기 덜 버리기
2011년 비존슨의 블로그를 보다 환경에 관심이 생겼다. 그는 4인 가족이 1년 동안 버리는 쓰레기가 유리병 하나에 담긴다고 했다. 나도 평소 버리는 쓰레기를 모두 기록했지만 줄이기가 쉽지 않았다. 쓰레기를 줄이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생각보다 컸다. 그 후 물건과 에너지를 덜 쓰고, 쓰레기는 덜 버리는 삶을 지향하게 되었다. 서울에 살면서 이를 지키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방법은 크게 네 가지로, 직접 만들고, 직거래하고, 거절하고, 대량 구매하는 것이다. 매달 열리는 도심 농산물 직거래 장터나 동네 시장을 이용하면 대형 마트보다 포장 쓰레기를 줄일 수 있다. 내가 할 일은 그것들을 담아 올 통을 준비하는 것이다. 시금치는 세탁 망이나 천 주머니에, 두부는 반찬 통에 넣는 식이다. 또 천연 세제를 이용한다. 여기에 필요한 베이킹소다, 구연산, 산소계 표백제는 한 번에 5킬로씩 사는데 이 정도면 1인 가구에서 1년 정도 쓸 수 있다. 때마다 사지 않고 세제 종류를 통일하면 그만큼 쓰레기를 줄일 수 있다. 더욱이 천연 세제는 물에 흘려 버릴수록 수질을 정화하므로 환경에도 도움이 된다. 화장품도 일 년에 한두 번 대량 구매한다. 화장품을 담는 플라스틱 용기는 쓰레기가 되겠지만 배송에 들어가는 쓰레기는 줄일 수 있다. 그 밖에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기 위한 지렁이 키우기, 수저나 컵 갖고 다니기, 도시락 싸기, 과대 포장 거절하기 등을 실천 중이다. 1년 간의 시간을 통해 쓰레기 덜 버리기 운동은 생활 방식을 바꾸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치 못하게 쓰레기를 버릴 경우, 스트레스 받지 않고 그럴 수도 있지, 뭐 하고 넘어가는 자세도 필요하다. 그래야 활동을 오래 지속할 수 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이 있다. 바로 건강과 돈 절약이다. 예전에는 편리함을 위해 편의점에서 음식을 사 먹었지만 이제 도시락을 싸거나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니 건강을 챙길 수 있다. 여기에 돈을 절약할 수 있는 건 덤으로 얻은 행복이다.
영웅이 등장하다!
작년 딸아이의 수능 날, 평소 엉뚱한 딸은 그날도 큰일을 치렀다. 시험에 늦어 경찰 사이드카를 타고 달리는 모습이 인터넷에 뜬 것이다. 사연인 즉 이랬다. 딸과 함께 나간 남편에게 다급한 연락이 왔다. "교육청에 전화해서 수능 볼 수 있는 학교가 있는지 빨리 알아봐!" 딸이 학교 이름을 착각한 게 화근이었다. 학교 가는 길에 아무도 없고 낌새가 이상해 남편이 확인해 보니 엉뚱한 곳에 도착한 게 아닌가. 하늘이 노래진 남편은 다급히 경찰서에 연락했다. 시험 이십 분 전이었다. 바로 그때! 영화 속 영웅처럼 하얀 헬멧을 쓴 경찰이 사이드카를 타고 등장했다. "출발할 테니 도로 막아 주세요!" 경찰은 무전을 하더니 딸을 태우고 왕복 8차선 도로를 가로질렀다. 해병대 아저씨들까지 지원에 나섰다. 그 사이 남편은 경찰서 교통관제 센터에서 무전기로 상황을 보고 받았다. 정말이지 영화 한 편이 따로 없었다. "거거 학교지요? 혹시 경찰과 온 수험생 있나요?" "네 입실해서 시험보고 있어요." 남편은 그제야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무사히 시험을 마치고 경찰 아저씨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는 딸. "아저씨 정말 최고였어요! 긴장감 넘치고 재미있었어요." 역시나 우리 딸다운 말이었다. 그날 영화 속 주인공처럼 나타나 도움을 준 사람들 특히 아이를 태워준 경찰분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 덕분에 딸이 원하던 대학에 갔다는 말과 함께.
시간 전망
자기 계발 분야에서 강조하는 개념 중에 시간 전망이라는 것이 있다.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멀리 내다보고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는 것이다. 부자들이 꼽은 경제적 성공 비결이 바로 시간 전망이라고 한다. 사회적 성취도가 높은 사람일수록 시간 전망 또는 시간 지평이 길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 말은 성공한 사람일수록 당장의 수입이 아니라 미래의 성공을 바라보며 그것을 위해 인내하고 시간을 투자한다는 방증이다. 이에 반해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에 속한 사람일수록 비교적 짧은 시간 전망을 갖고 있다. 즉각적인 만족감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부정적인 결과에 이를 것이 뻔한데도 참지 못하고 지금 편안한 길을 택하는 것이다.
찜질방에서의 세 달
1967년생인 소영 씨는 어릴 때부터 말을 차지게 한다는 칭찬에 아나운서와 탤런트를 꿈꿨다. 그러다 결혼하며 전업주부가 되었는데, 3년 만에 이혼했다. 그녀는 아들을 잘 키워야 한다는 책임감에 친정인 전주로 내려와 의류 매장 판매원으로 일했다. 그러던 중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그도 이혼한 뒤 아이 둘을 키우며 의류 매장을 운영했다. 자녀들을 지극정성으로 대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재혼했다. 그렇게 5년 정도 돈 걱정 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호사다마였다. 매장은 아웃도어 의류가 시장을 잠식하며 힘을 잃었고, 종잣돈 한 푼 건지지 못하고 빈손을 들었다. 그녀는 망가진 인생을 비관했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며 견뎠다. 수십 통의 이력서를 백화점, 유통 업체 등에 보냈으나 마흔살 이내라는 조항이 족쇄였다. 그러다 여성 일자리 센터에서 무료로 고객 상담사 교육을 받았다. 나는 그곳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그녀는 친절 강사와 고객 상담사 자격증을 따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고용 센터의 내일 배움 카드를 활용하는 정보를 줬다. 내일 배움 카드는 정부에서 교육비를 지원해 거의 무료였지만, 서울에서 교육을 받는 동안 드는 숙박비가 문제였다. 그녀는 짐 가방을 끌고 찜질방으로 갔다. 아침엔 강사 교육생답게 정장을 입고 나왔다가 저녁엔 찜질방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했다. 외계인을 보는 듯 부담스러운 시선이 있었지만 애써 참았다. 그녀는 세 달 만에 CS강사, CS리더스 강사, 병원 코디네이터, 성폭력 예방 강사, 정리 수납사 등 다섯 개의 자격증을 취득했다. 하지만 강사도 인맥이 있어야 했다. 대부분 모집 조건이 마흔 살 이내라 면접 기회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안양의 한 교육원에서 나이 제한이 있는데 이력서를 잘못 보냈다는 전화가 왔다. 그녀는 면접 기회라도 달라는 하소연과 함께 안양까지 달려갔다. 그녀의 실력과 절실함이 통했을까. 현장에서 바로 전임 강사로 발탁되는 천행을 얻었다. 그녀는 지금 전국구 강사가 되었다. 생활비가 급하다는 이유로 시간제 일자리나 부업을 구하지 않고 미래에 투자한 결단이 성공을 만들었다.
먹성이 가져온 인연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난 먹는 것을 좋아한다. 한창때인 스물다섯, 뒤돌아서면 허기지곤 했다. 하루는 친구가 소개팅하러 갔다가 먼 친척을 봤다고 말했다. 알고 보니 소개팅한 남자의 친구가 그 친척이었던 것이다. 이십 년 만에 보니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다음에 또 보기로 했다며 웃었다. 얼마 뒤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전에 만난 친척과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혼자는 쑥스러우니 같이 가자고 했다. 처음엔 내가 거길 왜라고 거절하다 고기랑 회를 먹자는 말에 솔깃해 따라 나섰다. 먹기 위해 간 자리니 당연히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입을 쩍쩍 벌리며 고기 먹는 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난 그러거나 말거나 그가 건네는 쌈도 척척 받아먹었다. 그날 이후 우리 셋은 매주 만나 맛 집을 찾아다녔다. 그는 나중에야 내 먹는 모습이 예뻐 계속 맛난 음식을 사 주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나의 먹성 덕분에 인연을 만나 1년 연애 끝에 결혼식을 올렸다. 아들 셋 낳고 알콩달콩 사는 요즘, 남편은 여전히 맛있게 먹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한다.
질문 바꾸기
일본 대학생 고바야시는 몇 달 치 집세가 밀려 마지못해 핫도그 먹기 대회에 도전했다. 반드시 우승해야 했던 그는 전 대회 영상을 보며 참가자들이 별다른 전략 없이 무작정 핫도그를 먹는 걸 확인했다. 고바야시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핫도그를 먹을까라는 그들의 질문이 잘못됐다고 판단했다. 그는 질문을 이렇게 바로잡았다. 어떻게 하면 핫도그를 더 쉽게 먹을 수 있을까? 질문을 바꾸니 문제의 해결법도 달라졌다. 그는 실험을 거듭해 핫도그를 쉽게 먹는 방법을 찾았다. 우선 핫도그와 빵을 분리하고, 한 손으로 소시지를 먼저 먹으면서 다른 손으로 빵을 물에 적셨다. 물에 식물성 기름을 타기도 하고 먹으면서 뛰고 꿈틀거리기도 해 봤다. 온갖 실험을 통해 핫도그를 먹는 가장 쉬운 방법을 찾아낸 그는 기존 기록의 두 배가 넘는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챔피언이 되었다. 12분 동안 무려 50개의 핫도그를 먹은 것이다. 그 후 여섯 차례나 우승했다.